"전력이 계속 갈아 먹히고, 정체불명의 군대는 계속 뒤에서, 동에서, 서에서 번쩍하고, 병력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고, 거란군은 황제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을 거예요. 어디에서도 이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JTBC '평화전쟁 1019'에서 《고려전쟁 생중계》의 저자 정명섭 작가가 한 말입니다.
흥화진을 함락시키지 못한 거란군은 후방에 고려군을 그대로 놔둔 채 서경으로 진격합니다. 이때 흥화진을 지켜낸 양규 장군은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아직 건재한 통주성으로 가서 천 명의 군사들을 수습합니다.
흥화진 남쪽 무로대에 주둔한 20만 거란 대군에 의해 철저히 틀어박혀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양규 장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아주 은밀하게 부대를 움직인 듯합니다.
곽주성 탈환
거란군이 점령한 곽주성에는 6천 명의 수비군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본래 공성을 하는 군대는 수성하는 군대의 10배가 되어야 성을 점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양규 장군은 1700명의 병력으로 6천 명의 거란군을 몰살시키고 곽주성을 탈환합니다.
어떻게 곽주성 탈환이 가능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1700명의 병력으로 6000명의 수비군을 이겨내기 위해선 정공법으로 싸우지 않고 무언가 계략을 썼을 거란 추정이 많습니다.
책략을 써서 성 안으로 잠입했거나, 내부에 포로로 잡혀 있는 세력들과 은밀히 내통해 순식간에 곽주성을 점령했을 수 있습니다.
이 곽주성 탈환을 계기로 전쟁은 서서히 거란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 손에 남아 있었다면 보급로가 유지돼 서경이 함락됐을지도 모릅니다.
곽주성을 잃은 거란군은 서경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진격하지만 현종은 이미 몽진을 떠난 이후였고, 더 이상 남하하기에는 무리라는 판단을 합니다. 후방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보급선을 길게 가져갈 수 없었던 탓이죠.
결국 거란군은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 철수를 개시합니다.
양규 장군의 반격
이후 양규 장군의 살육전이 펼쳐집니다.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귀주 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거란군을 급습해 1만 명을 죽였고, 이에 맞춰 양규 장군도 무로대를 급습해 거란군 2천 명의 목을 베고 고려 백성 3천 명을 구출해 냅니다.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했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 방향으로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의 후미를 공격했습니다.
이어 이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거란군은 2500명의 군사를 잃고, 고려군은 포로 1천 명을 구출합니다. 3일 후에는 여리참에서 싸워 거란군 1천 명을 베고, 포로 천여 명을 되찾습니다. 이날 하루 동안 세 번 싸워 모두 이겼습니다.
양규 장군과 김숙흥의 죽음
1011년 1월 28일 양규 장군과 김숙흥은 애전(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에 거란군의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거란군 1천 명의 목을 벱니다. 그런데 이 애전에 거란 황제 성종이 이끄는 고려 본대가 나타납니다.
수 만이 넘는 거란군은 양규 장군과 김숙흥의 고려군을 포위하고 공격합니다. 고려군은 처절하게 싸웁니다. 그리고 양규와 김숙흥은 여기서 목숨을 잃고, 이들이 이끄는 고려군 또한 전멸합니다.
사실 그동안 양규 장군과 김숙흥의 싸움을 보면 소수의 거란군을 공격하고 빠지는 형식의 전략적인 전투였는데 이때는 거란의 본대를 만나고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일각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양규 장군이 고려 백성들의 피난 시간을 벌어주려고 분전한 것 아니겠냐는 추측을 내놓습니다.
양규 장군과 김숙흥 휘하의 고려군은 전멸하고 말았지만 거란군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친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이 뛰쳐나와 거란군의 후위를 또다시 공격했고, 거란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해야만 했습니다.
양규 장군은 원군도 없이 한 달 동안 7번을 싸워 수많은 거란군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렇게 그가 구출한 고려인 포로는 3만 명에 이른 것으로 전해집니다.
양규 장군이 있었기에 거란의 후퇴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 고려가 수도 개경을 잃고도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활약은 거란의 3차 침입 때 한국 야전 사상 가장 완벽한 승리라 할 수 있는 귀주대첩의 신화를 쓸 수 있었습니다.
※ 앞선 내용은
2024.01.04 - [끄적여보는 역사 이야기] -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다시 보기: '흥화진의 늑대' 양규 장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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